‘순수 고시파’ 세무사업 24년…다국적기업 급여•세무컨설팅 분야 전문
인생좌우명 ‘불경일사 부장일지’ “인생은 언제나 도전하는 미지의 세계”

“비영리법인 회계사 독식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특화전략 세워 공략 중”
바람 있다면, “한국세무사회가 먹거리 개발에 선도적 지혜를 모았으면”

 

세무업계 차세대 톱클래스 김용기 세무사를 만났다. ‘세무법인 산경’ 본점(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107길 12 한일빌딩2층. 삼성동)의 대표세무사다. 원로 송춘달 세무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주신 분이라 나이가 지긋하신 분으로 지레짐작은 했지만, 착각이었다.

1967년생, 52세. 동안(童顔)이라 40대 초반 쯤으로 보인다. 더 놀란 것은 세무사개업 24년차다. 따지고 보니 25살에 세무사시험에 합격해 26살에 개업을 한 ‘순수 고시파’ 출신 세무사다. 국세공무원 출신도 아니고, 회사 경리파트 출신도 아닌 ‘파~란 세무사’가 초창기 시장개척에 엄청 고생이 많았겠다고 하자 한참동안 숙연해 지면서 금새 눈시울이 불그레해 진다.

“초창기 고생을 하면서 세무사생활의 좌우명을 ‘불경일사 부장일지(不經一事 不長一智)로 삼았습니다. 경험없인 지혜와 식견이 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곱씹어보면 고통 없인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정말 겁 없는 나이에 겁 없이 덤볐습니다. 지금 나 자신을 평가하려면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셈하고 싶습니다.”

세무사업계 차세대 주자 김용기 대표세무사를 만나 차 한 잔을 나누며, 절반의 성공담과 미래 먹거리 걱정, 차별화 전략 등을 들어봤다.
 

◆ 세무사 생활 24년차 어땠습니까?

“대학졸업 후 2년여 열심히 공부해 세무사시험에 합격했습니다. 1차 시험은 단번에 합격했지만 2차 시험에 떨어져 최종합격까지 2년이 걸렸습니다. 1994년에 세무사자격을 취득한 후 개업은 2년 뒤인 1996년 8월에 했습니다. 개업사무실은 삼성동 무역센터 건너편 옛 삼성세무서 부근 이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개업초창기는 누구나 힘들겠지만, 무주공산에 홀로 버려진 고아처럼 그저 막막한 처지였지요.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다보니 주변에서 고맙게 도와주는 사람이 생기지 뭡니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씀이 실감날 정도로 ‘실력 있고 열심히 일 잘하는 세무사’라는 입소문이 확산되면서 수입규모도 매년 늘어났습니다.”

김 대표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개업초창기 고생했다는 말씀이 실감나지 않는다. 마치 행운이 따라서 성공한 세무사처럼 들린다고 하자, 손사래를 친다.

“자신을 알리는 홍보전단지를 들고 가가호호 시장바닥을 수도 없이 돌아 다녔습니다. 전단지 1000장을 돌리면 상담 및 자문을 의뢰해오는 사례는 1건 정도였습니다. 출퇴근 시간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4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낮 시간대에는 지역 업소를 돌아다니며 자신을 알리는 일을 한 달 정도 반복하다보니 다리가 퉁퉁 부어 몸살이 나기 일쑤였으며, 코피까지 쏟아 냈습니다. 이런 일을 4~5개월 반복하다보니 기장수임건수가 늘어나고 기업경영컨설팅 건수도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주 수입원이 기장이다 보니 직원급료를 지급하고 나면 세무사에게 돌아오는 수입은 쥐꼬리였습니다. 차별화 특화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딱히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한국세무사회 주관 ‘다국적기업 세무컨설팅 특강’이 열린다는 정보를 접하고 강의를 들었습니다. 특강 내용은 급여서비스 등 세무신고 아웃소싱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특강을 맡은 선배세무사에게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도 많이 했고 사무실에 찾아가 개별자문도 받았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 전공과목은 경제학이지만,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뒀기 때문에 외국기업에 대한 세무지원은 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다국적 기업을 대상으로 문턱이 달도록 쫓아 다녔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현실이 됐습니다. 직원 7명과 함께 최선을 다하다보니 거래기업과의 신뢰 폭이 쌓이면서 ‘든든한 세무사’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러다보니 그분(고객)들이 소개해주는 수임고객도 점차 늘어나면서 일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 세무사 생활 24년의 에피소드 및 보람

“저희 나이 또래가 다 그러하듯 저의 대학시절은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대학에 입학해 대학 2학년 때에 군대를 다녀와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사회진로를 놓고 고민 많이 했습니다. 공인회계사가 될 것인가, 세무사가 될 것인가에 대해 갈등했습니다. 갈등의 결말은 세무사였습니다.”

이유는 공인회계사의 길은 통상 회계법인에 취업해 봉급생활자가 되어 회사와 윗사람 눈치를 봐야하고, 세무사는 자영업으로 얽매이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무사를 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절반의 성공’에 대한 설명에서 세무사로서의 뛰어나서가 아니라 운칠복삼(運七福三)의 행운이 따랐다고 겸손해 했다.

“현재는 다국적기업에 대한 급여(Payroll) 및 세무자문 등이지만 초창기는 건설프로젝트사업에 관여하게 되어 현대건설, 현대산업개발, 대우건설, 환화건설 등 1군 건설업체 재무담당 임원들과 알게 됐습니다. 건설프로젝트 사업은 단기간에 끝나는 사업이 아니고 짧게는 3년, 길게는 5~6년이 걸리는 사업이기 때문에 친분이 두터워진데다 제가 맡은 세금문제는 깔끔하게 처리함으로써 친분의 벽이 두덮게 쌓이면서 업무영역도 신장됐습니다. 기억에 오래 머무는 업무로는 군인공제회 주관 남부터미널 건설입니다. 이 사업은 2000년 초에 시작되어 8년 걸려 2008년에 마무리 됐으니, 세무자문도 힘들었지만 그 대신 자문료가 짭짤해 세무사사무실 운영의 내실을 다지는데 큰 보탬이 됐습니다. 이 밖에도 당시 상가 및 오피스텔 건설이 붐을 이뤘고, 분양 이후에 처리해야하는 환급업무 역시 건수가 많아 사무실 신장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 예측되는 미래 세무업무의 변화는?

“기장시장은 과당경쟁의 요인과 ICT기술 발달(AI)로 인한 자동기장 및 신고시대가 열리면서 사라질 공산이 높습니다. 회계법인에서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는 비영리법인 및 공공기관의 급여 및 4대보험, 세무자문 등을 아우르는 아웃소싱을 세무업계영역으로 끌어와야 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세무사 각자의 부단한 노력도 있어야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한국세무사회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실 급여문제와 4대 보험, 세무신고, 세무자문 업무는 세무사의 고유 업무가 아닙니까. 고유 업무영역을 타자격사 등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며, 지금도 포화상태인 세무사를 매년 1000여명 가까이 양산시키고 있는 정부 정책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먹거리시장 개척 및 세무사제도 정책변화를 위해 본회가 적극 나서야 할 때입니다.”
 

◆ 새로운 먹거리 개척을 위한 개인적인 의견이 있다면?

“얼마 전 미국계 다국적기업으로부터 종업원 5만 명에 대한 급여관리 및 세무자문업무 아웃소싱을 제안 받은바 있습니다. 욕심은 나지만 저희 세무법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아웃소싱 전문업체가 많은 인도 쪽에다 자문을 받아보라고 했습니다. 고객은 급여 관련 업무보다 세무자문을 잘 하는 한국세무법인을 원했다며 아쉬운 표정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한국세무사회 내부에 아웃소싱업무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시스템기구가 없다는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 개척하고 싶은 새로운 시장은?

“비영리법인 중 의료법인을 겨냥해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보려고 전략을 짜고 있습니다. 학교법인 및 사회복지법인 등 비영리법인이 많지만 우리나라가 고령화시대로 접어들면서 노령인구가 매년 증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의료법인 수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지금까지 세무업계의 움직임은 병의원 중심의 아웃소싱에 그쳤지만 시대의 변화에 발 맞춰나가려면 의료법인 쪽에 포커스를 맞춰 업무영역을 넓혀나갈 계획입니다. 한편 시야를 넓혀 우리나라 기업이 많이 진출해 있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중국 등 해외시장 개척에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확한 정보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않았습니다만 해외진출 기업들이 부지런하고 일 잘하는 한국세무사들이 진출해 질 높은 세무서비스를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 한국납세자연합회 이사로 10년간 봉사했습니다. 특별한 사연이 있나요?

1999년경 대학교 은사이신 이필우 교수님과의 인연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정년퇴임 후 연로하신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던 교수님의 열정에 많은 감동을 받았고 많은 것을 보고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연합회 활동을 하지는 않으나 교수님과는 가끔씩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 유년-고교-대학시절의 추억

저의 고향은 경상북도 상주의 한적한 시골의 농촌마을입니다. 고향이 농촌이신 분들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묻어나는 아련한 곳. 작은 동산과 넓은 들판 친구들과 함께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꿈을 꾸듯 유년 시절을 고향에서 보낸 후 고등학교입학과 동시에 서울 생활을 한 것이 지금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대학시절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5년 시작하였습니다.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많은 방황과 고민 그리고 많은 친구를 사귀었던 시기인 것 같습니다. 캠퍼스 잔디밭에서 하숙방에서 막걸리 한잔으로 벗들과 나누던 자유와 낭만은 지금도 우정으로 살아남아 삶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제 가슴에 뛰고 있는 열정은 아마도 그 당시 꿈 많은 소년의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꼭 이루고 싶은 것, 꼭 하고 싶은 것

“세상은 넓습니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아직도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 꿈 많은 소년입니다. 네팔로 에베레스트로 등산도 가보고 싶고 산 정상에도 오르고 싶습니다. 학창시절 꿈꾸었던 책과 함께 여유로운 휴가도 즐기고 싶습니다. 이제 더 시간이 가기 전에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제 주변을 돌아보고 남을 위해서도 살아 보고 싶습니다.”

◆ 존경하는 인물(이유)

“조선 후기의 상인으로 ‘임상옥’이라는 분이 기억에 남는 분입니다. 예전 TV 드라마로 방영되었고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납니다. 이후 ‘최인호’의 소설에서 그 분에 대한 얘기를 접하다보니 더욱더 매력적인 인물로서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조선후기의 중간 계급인 역관의 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조선후기 가장 성공한 상인이요 사업가일 것입니다.”

“작금의 미중간의 무역전쟁 등 세계가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국민과 나라를 부강하게 해줄 임상옥 같은 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분이 유언으로 남겼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재물은 고이면 썩는 물과 같고, 사람이 저울과 같이 정직하지 못하면 언젠가 파멸을 맞는다.”

 

◆ 김용기 세무법인 산경 대표세무사는?

김용기 세무사의 고향은 경북 상주시 함창읍 척동리. 나이 만 52세. 세무사경력 24년이다. 그는 유달리 동안이다. 대화 중 가끔씩 웃는 모습은 더 앳되게 보여 40대 초반나이로 착각할 정도로 미남형이다.

건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해 회계사보다 세무사가 적성에 맞겠다싶어 세무사를 택했다는 그는 현재 스스로의 평가에서 ‘절반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평가기준을 묻자 연봉수준이 1억원대를 넘었으니, 더 이상의 욕심은 과욕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현재 외국계기업 급여 관리 전문 세무법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그는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비영리법인 중 의료법인에 포커스를 맞춰 세무컨설팅 정략을 짜고 있다. 그의 새로운 비상(飛上)을 기대된다.

-1992년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94년 세무사 자격증 취득
-1996년 한국납세자연합회 이사
-서울지방국세청 국세체납정리위원
-동작세무서 이의신청심의위원, 고충처리위원회 위원
-동작세무서 납세자보호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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